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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Music

가수 사이(싸이 아님)

by 해운대등대지기 2011. 8. 11.

출처 : 살림이야기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386

 

솔직 담백한 유기농펑크, 들어보실래요? - 가수 사이

글 이승진 사진 장성백


가수 사이

솔직담백한
유기농 펑크, 들어보실래요?

유기농과 펑크. 누가 들어도 쉽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 조합이 음악 장르를 만들어낸다면? 왠지 신나게 농사짓고 음악하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붙여놓고 보니 제법 잘 어울린다싶다. 만나는 사람마다 음악 장르가 뭐냐고 물어 ‘유기농 펑크’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는 가수 ‘사이’. 자칭 ‘슈퍼백수’라고 말하는 그는 한때 고민 없이 석유 펑펑 써대는 세상에서 냉장고 쓰지 않고, 세탁기 돌리지 않고, 텔레비전 없는 삶을 기꺼이 택했던 사람이다. 에너지 낭비가 어디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뿐이랴.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는 삶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그가 스스로 선택한 슈퍼백수 생활을 잠깐 들여다봤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목소리는 노래를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이 그려지는 목소리입니다. 조그맣게 웅얼거리거나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정이 조금 흔들려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런 음악이 진짜고 맛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음악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가수 사이가 한 이 말을 듣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반가웠다. 그는 내가 꿈이라고 생각한 모든 걸 현실로 만들어 살고 있었다. 시골에서 먹을 만큼의 농사를 지어 아내와 도란도란 살고 있었고, 아는 사람 죄다 불러 시끌벅적하게 해치우는 예식장 결혼식 대신 아내의 머리에 작은 화관 얹어주고 몇몇이 모여 동산 결혼식까지 올렸다. 게다가 양 볼이 빨갛게 바람이 들어, 이 동네는 다 내꺼다 싶게 뛰어다니는 유난히 눈이 동그랗고 또랑또랑한 개구쟁이 ‘느티’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나를 믿지 않아

돈 없어도 시골에서 팔자가 늘어지는 걸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고 전기세 1천600원

텔레비전 핸드폰 세탁기 냉장고 없어도 좋아

농사로 돈을 벌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

그냥 줄이고 덜 쓰고 가난해도 괜찮을 걸

아이가 태어나도 학교엔 안 보낼 거야

나랑 같이 밭일하고 밴드하고 또 산책하고

<사이 - 아방가르드 개론 1장 中>


본명이 따로 있지만, 그가 전부터 닉네임으로 쓰던 ‘사이’가 본명보다 익숙하다. 그의 아들 느티도 출생신고 할 때는 성을 썼지만, 부르고 듣기에 ‘박느티’보다는 ‘느티’가 더 좋아 앞으로도 성을 쓰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는 지금 괴산에 살고 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신기리의 신기학교. 신기초등학교가 문을 닫고 새로이 문을 연 신기학교는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아이들이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이곳의 사택에서 사이의 세 식구가 살고 있다. 사이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이웃 마을에서 집을 짓는 일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 달 정도는 집 짓는 일을 한다고 했다. 시골에 살기는 하지만, 농사로 돈벌이를 하는 건 아니라는 그는 신기하게도 돈이 떨어졌다 싶으면 돈 생길 일이 들어온다며, 올봄을 지나면서도 공연 의뢰가 거의 없어 생활이 걱정되려던 차에 이 일이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전교에 소문난 가수
“노래요? 엄청 불렀죠. 중·고등학교 때는 길거리 다니면서 늘 노래 부르고 다니고, 교실에서도 그렇게 크게 불렀어요. 옆 교실까지 들리게. 학교 다닐 때 제가 구기종목을 잘해서 싸움도 잘하는 줄 알았는지, 애들이 안 때리더라고요. 지금 같으면 누군가 팼을 법도 한데. 옛날엔 친구는 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돈만 생겼다 하면 음반을 사고 그랬죠. ‘전영혁의 음악세계’라고 음악 좀 듣는 사람은 다 아는 새벽에 하는 방송을 들으며 알게 된 노래가 많았어요.”
전교에 소문이 날 정도로 노래를 부르고 살았으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졸업 후 “우리 대학 밴드보컬이 군대에 가서 대체할 사람이 필요한데, 너 만날 노래하지 않았냐. 너 할 수 있을 거다. 해보자”고까지 했을 정도다. 그렇게 사이의 첫 공연은 친구가 다니던 학교의 밴드와 함께 우연히 이뤄졌다. 
그때만 해도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고, 레코드 가게 주인이나 라디오 DJ가 꿈이었다. 그러나 진짜 가수가 돼야지, 음악을 해야지 마음먹었던 건 군대 있을 때였다. 뭘 하면 행복하고,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끝에 이거다, 싶은 느낌이 온 게 음악이었다. 제대를 하고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에 온 것도 음악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산에선 센 음악이 대세거든요. 부산 애들은 무조건 록앤롤이에요. 중학교 다닐 때 친구 중에 한 명이 메탈리카를 듣고 있었는데, 저는 그때 시인과 촌장을 듣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놈이 시인과 촌장을 비웃더라고요. 메탈리카 정도는 들어야 한다고.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죠. 내 취향은 왜 이럴까, 내 취향은 왜 가요일까. 지금도 센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음악을 시작했지만, 한국에서 음악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음악으로 돈을 벌려면 ‘돈이 되는’ 음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돈은 다른 일을 해서 벌고, 음악은 내가 하고 싶은 스타일대로 하자는 생각으로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국립극장 기관실에서 일하기도 했고, 출판사에서도 일하면서 밴드를 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고개 푹 숙이고 뒤돌아 연주하는, 악기나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 마치 신발을 쳐다보는 것 같다고 해서 ‘슈게이징(Shoegazing)’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울한 음악 장르에 심취했었다. 지금 그가 선보이는 단순한 코드의 경쾌한 음악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의 음악이 지금의 스타일이 된 건 길거리밴드를 하면서다.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 중이던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밥을 하는 모임이었던 ‘투쟁과 밥’에서 만난 친구들과 길거리밴드를 시작해 홍대, 철거촌, 새만금, 평택, 심지어 유럽까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가서 춤추고 노래했다.

 

석유문명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그의 삶을 바꿨다
그런 그가 시골에서 냉장고와 텔레비전 없이 노래하는 가수라는 독특한 이력이 붙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밴드의 한 친구가 석유문명에 관한 외국 다큐멘터리 <The End of Suburbia>를 보여주었는데, 그 다큐멘터리 한 편이 그의 삶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이 지어준 집에서,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이 키우고 만든 음식을 먹는, 다른 사람이 무엇 하나라도 해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껍데기뿐인 삶.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고, 그는 끝없는 소비만을 이끌어 내는 도시의 일원일 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서울을 떠야지, 생각한 것이 같은 마음을 가진 아내를 만나자 망설임 없이 시골로 가게됐다.
지리산 자락이 포근히 감싸 안은 경남 산청에 땅을 조금 사서, 450만 원을 들여 다섯 달 만에 집을 지었다. 전기 쓸 생각 안 하고 지은 집이니, 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살기 힘든 집이었다. 화장실도 멀고, 방 하나에 부엌 하나. 씻는 데도 바깥에 있는 그런 곳. 하지만 정사각형 두 칸으로 단조롭게 집을 지은 이유는 전적으로 잘 지을 줄 몰라서였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도시에서 생긴 습관이 참 버리기 어렵다는 것, 불편한 것은 끝이 있지만 편한 것은 끝이 없다는 것.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휴대폰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똑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450만 원으로 집을 짓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 사람이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우면 이상하게 변할 수 있기에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어떤 사상이나 논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긍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산청에 애써 지은 집을 놔두고 지금의 괴산으로 옮긴 까닭이 바로 좀 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어서였다. 지금 살고 있는 신기학교는 몇 년 전 사이가 괴산귀농자 모임 송년회에 공연을 하러 갔다가 알게 된 곳이다. 폐교를 개조하여 교실 바닥을 삽으로 퍼내고 구들을 놓은 것과 아이들에게 진짜 공부를 알려주기 위해 “마을에 인사하기, 천막집 짓기, 물 따라 (계곡탐험), 곤충따라, 식물따라 등의 놀이공부를 만드는 젊은 친구들의 건강한 모습을 보며 좋은 곳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때 만난 학교의 선생님들이 사택이 비어있으니까 같이 살자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지금 이곳, 신기학교에 왔다.
이곳에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그들만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아이들이 너무 잘해 감동을 받고, 재미도 붙어 동요를 만들어 보고픈 생각도 든다. 요즘도 계속 노래를 만들고 있는 그는 올해 또 하나의 음반을 낼 계획이다. 2007년 말에 완성한 첫 번째 음반은 작사와 작곡, 연주 등 앨범제작에서 판매까지 필요한 모든 작업을 개인 컴퓨터와 마이크 하나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음악만은 꼭 아들 느티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할 만큼, 그에게서 음악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 모로 그는 시골에 있는 게 좋다. 생활비가 덜 드니 많이 안 벌어도 된다는 것. 실제로 거의 모든 문제가 돈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그는 모든 가치가 돈에 집중돼 있는 것이 현대문명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를 키워 보니 확실히 도시보다는 시골이 좋고, 소가족제보다는 대가족제가 좋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있다. 엄마 아빠도 초보라, 아이가 어른들 틈에서 자연스럽게 크는 게 정말 다행이다.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 모두가 아이를 돌보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주류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대로, 믿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보통은 내가 못 살아본 삶을 살아 부럽다거나, 나의 용기 없음을 탓하며 아쉬워하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진짜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게 된다. 사이를 만나고 돌아와서 그랬다. 어쩌면 그는 그의 표현대로 슈퍼백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삶의 방식을 택했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사는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인터뷰를 하면 재미가 없거나, 나중에 결과물이 사실과 달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이. 그를 만난 후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그의 음악을 옆에 달고 살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음악뿐인 것 같다. 목소리와 리듬 그리고 노랫말, 어느 것 하나 그를 닮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