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에서 정규직 정리해고 이전에 지난 4년간 영도조선소, 울산, 다대포공장에서 일하던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이 먼저 잘려나갔습니다. 정리해고 이후, 영도조선소 현장에서는 한여름 땡볕에서 주어지는 오침 시간마저 사라졌습니다. 한진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들은 딸랑 얼음물 한 병 갖고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리는 철판 위에서 작업을 강요받습니다. 고용불안 역시 엄청나게 가중되고 있습니다. 하청업체에는 저마다 '물량팀'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일정 물량(일감)만 끝마치면 해고되는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건설업종의 십장(오야지) 제도나 다름없습니다. 며칠 일하다 해고되고 며칠 지나 재고용되는, 불안한 삶을 강요받습니다."
25일 오전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STX조선,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들로 이뤄진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전국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당하는 차별과 억압 사례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앞서 이들은 출근하는 한진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들에게 함께 단결할 것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나눠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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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트위터 @allstanby |
8대 조선소 사내하청 정규직의 2~4배...다단계 하도급 '물량팀' 늘어
금속노조 조선분과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등 8개 대형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은 690개 업체에 6만8000여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 사업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동자의 2배를 훌쩍 넘어선다. STX조선의 경우 생산현장 정규직 노동자는 1016명인 데 견줘 사내하청노동자는 4500명으로 비정규직 비율이 443%나 된다.
2009년 조선업에 위기가 닥치면서 전국에서 수천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조선 현장에서 쫓겨났고, 소형 조선소에 일상화됐던 '물량팀'이 대형 조선소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물량팀이란 소사장제와 유사한 변형근로형태로 '하청의 하청', 다단계 하도급을 일컫는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에 따르면 대형 조선소 대부분이 사내협력사 기본거래계약서 등을 통해 재하도급을 금지하고 있지만 최근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에서 물량팀이 늘고 있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한진중공업도 정리해고 이후 하청노동자 대부분이 하청의 재하청, 하청을 일당제로 전락시키는 '물량팀' 형태로 돌려지고 있다"고 밝혔다.
중대재해 다발 죽음의 조선소
올해 들어 대우조선에서만 7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STX조선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모두 6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조선업의 산업재해 발생률은 전체 산업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부산울산경남노동자건강권대책위에 따르면 지난해와 올해 대우조선과 STX조선에 2차례씩 노동부 차원의 특별근로감독이 실시됐고, 60~1000여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례를 적발해 개선명령을 내렸지만 원시적인 중대재해가 그치지 않고 있다.
부울경노동자건강권대책위는 조선업 중대재해 다발 원인으로 이윤에 혈안이 된 생산지상주의와 하청 증가에 따른 재해예방 시스템 붕괴, 노동부의 사업장 지도감독 소홀.방기 등을 들었다.
특히 하청업체에 대한 기성(도급금액) 삭감과 안전보건조치 방기, 물량떼기를 비롯한 다단계 하청 급증, 수주 증가에 따른 공기 단축과 노동강도 강화가 조선업 중대재해를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꼽았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지난 4년간 32명의 노동자가 죽어간 필리핀 수빅조선소 사례는 남의 나라 애기가 아니다"라며 "매우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고 있는 조선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재해 사각지대에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쥐꼬리 휴가비마저 착복, 서러운 하청노동자
금속노조 조선분과에 따르면 조선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통상임금은 정규직의 2/3에 못미친다. 여기에 상여금과 성과급, 일시금, 각종 기업복지 등을 합쳐 따지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STX조선의 정규직은 통상임금의 600%를 상여금으로 받지만 비정규직은 기본급의 230%밖에 받지 못한다. 대우조선은 지난해 통상임금의 400%를 성과급으로 정규직에게 지급했지만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의 70%만 줬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대우조선, STX조선 정규직 노동자들은 올해 임금협상에서 호봉승급분을 포함해 대부분 9만원 안팎의 임금이 올랐고, 격려금과 일시금 등으로 수백만원을 받은 반면 하청노동자들은 100만원 남짓의 휴가비만 손에 쥐어야 했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2009년 조선업 위기 때 잘리지 않은 하청노동자들은 10~20%의 시급.일당 삭감을 겪어야 했고, 삭감된 임금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면서 "대형 조선소 자본이 올해 정규직 노동자 기본급을 9만원 가까이 인상한 것과 비교했을 때 하청노동자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원청사가 하청노동자들에게 책정해 내려준 휴가비를 하청업체들이 하청노동자 1인당 50만원씩 떼먹고 지급해 하청노동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먹고 튀는' 하청 사장, 원청은 나 몰라라
지난 18일 경남 진해 오리엔탈정공 하청업체인 (주)아산 김아무개 대표가 7월분 기성금 전액을 챙겨 잠적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하청노동자들은 19일 오리엔탈정공 원청 사장실을 점거해 나흘째 밤샘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2009년 조선업 위기 때 조선소 원청은 도급비를 많게는 30% 삭감했다. 한진중공업의 경우 업계 최초로 하청업체와의 계약에 최저낙찰제를 적용했다.
수익이 떨어진 하청업체 사장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먹고 폐업해 도망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오리엔탈정공처럼 원청이 하청업체와 계약하면서 공탁금을 제대로 받지 않아 하청업체 사장이 기성금을 챙겨 도주하면 하청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을 방법이 없어진다는 데 있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원청은 하청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청은 최고 말단 밑바닥 하청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악순환 구조가 가히 '먹이사슬'이라 불러도 좋을만큼의 수준"이라고 개탄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은 수천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장학재단을 만든다고 한다"며 "하청노동자들의 피눈물을 뽑아 벌어들인 돈으로 대권가도를 달리겠다는 것인데 그 돈이면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노도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생활임금을 책임지고도 남는다"고 비판했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혼자서는 두렵고 힘들지만 동료들과 함께할 때는 무서울 것이 없다. 물이 가득 들어왔고,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희망 배'를 띄울 때"라며 "차별과 억압의 설움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자"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