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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창고]/생각주머니

[펌-오마이뉴스]정연주 전 KBS 사장이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

by 해운대등대지기 2009. 9. 1.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이명박 정권에 의해 지난해 8월 '강제해임'을 당했던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최근 비슷한 위기에 처해있는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오마이뉴스>에 공개되는 이 글은 정연주 전 사장이 강제해임을 당한 후 처음으로 쓰는 칼럼이다. <편집자말>

엄기영 사장께 드립니다.

 

참,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뵌 게 지난해 봄으로 기억됩니다. 방송사 출신 중 국회의원에 당선된 몇몇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방송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자리였지요. 그때를 잠시 되돌아보니,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유난히도 방송, 신문 등 언론계 출신들이 대통령 후보 특보나 국회의원 후보로 많이 뛰어들었지요. 그들 가운데 한나라당에 들어간 언론계 출신들이 지난번 미디어 관련법 난장판 때 보니, 맹활약을 하더군요.

 

그날 아침식사 자리 때, 엄 사장이 거의 줄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이 담배 피우면서 "이렇게 담배 많이 태우면 앵커할 때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제가 묻자, 당신은 그냥 사람 좋게 웃기만 했습니다. 아마 지금은 담배를 더 많이 태우시겠지요. 건강 챙기셔야 하는데…. 저도 14년간 끊었던 담배를 2004년 8월, KBS 개혁한다면서 팀제 도입하고, 지역국 7개 폐쇄할 때 다시 피우게 되었습니다. 개혁, 참 힘듭디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까닭

 

  
MBC 엄기영 사장
ⓒ MBC
엄기영

오늘, 엄 사장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 당신이 가슴 저미게 느낄 고뇌와 고통, 북풍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을 제가 지난해 비슷한 처지에서 절실하게 경험한 터여서, 그 고뇌와 고통,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받고 있는 천근 무게의 사퇴와 해임 압박, 그 방면에서는 제가 선배니까요.

 

저는 사퇴 압박을 꽤나 오랫동안 받았습니다. 2003년 4월말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집중 포격을 가했지요. 그것도 5년여 내내. 조중동의 공격은 참 집요했습니다. 언젠가 사장 재임 시 어느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기사 검색을 해보았더니, 조중동에서 기사, 해설, 칼럼, 사설을 통틀어 가장 지독하게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는 인물이 1위 노무현 대통령, 2위 정연주였다면서 "선배님, 오래 사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되어 겪어 보니 언론의 가장 기본인 사실 보도를 하지 않습디다. 그러니 누리꾼들로부터 "조중동이 신문이면, 우리 집 두루마리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라는 조롱을 받는 것 같습니다. 직접 당해 보면 그 실체가 확연하게 보이지요.

 

한나라당의 공격은 차라리 단조로웠습니다. KBS 결산 때나 국정감사 때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책임지고 물러나라"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 단골메뉴에 "물러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책임이다", 뭐 그런 식의 단골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사퇴, 해임 압박은 2007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그 강도를 달리했습니다. 그 과정의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역사에 증언을 할 것입니다만, 참 험한 꼴 많이 겪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 방통위 위원장은 당시 KBS 김금수 이사장을 만나기만 하면 '정연주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퇴 압박을 가했다고 전해들었고, 감사원, 검찰, 국세청, 이사회 등이 총동원되어서 정연주 참수 작전을 했습니다.

 

원칙이 나를 버티게 했습니다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분 요즘 보면, '방통' 위원장 자리를 '송대령' 자리로 착각하는 것 같아요. 마구 칼을 휘두르고 있어요. KBS는 색깔 없는 방송으로 만들겠다, MBC의 정명을 찾아주겠다, EBS를 어디 하고 합치겠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지요. 이 정권의 오만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 남소연
최시중

이런 오만에는 반드시 국민의 심판이 뒤따릅니다. 국민을 바보로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오만한 짓을 주저 없이 함부로 하는지. 이분을 볼 때마다 조선왕조 때 참수형을 집행한 '망나니'가 떠오릅니다. 무모함입니다.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사람 목을 자르잖아요? 그에게는 이처럼 오만에 더하여 무모함까지 있습니다. 정권이 무한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오만하고 무모할까 심히 걱정이 됩니다. 이 정권은 이제 3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게다가 레임덕이다, 대선 국면이다 어쩌고 하면 3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그런 온갖 모욕과 핍박, 인신공격을 당하면서도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고 '해임'이라는 강제수단으로 저들이 나를 쫓아낼 때까지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아주 단순하게도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공영방송 KBS에는 정치적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바탕은 공영방송 KBS 사장의 임기 보장이라고 저는 아주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유, 민주, 인권, 평화, 평등을 위해 온갖 희생과 고난을 치르면서 성취한 것 중 하나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내게 부여된 역사적, 사회적 책무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을 저는 역사의 축복으로까지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아무한테나,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해임'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리한 짓을 다한 이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여지없이 폭로되었으니까요. 신태섭 교수 해임의 무죄 판결, 저의 배임혐의 1심 무죄판결은 이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확인시켜준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 기회를 준 것은 분명 역사의 축복이며, 그런 것을 통해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엄 사장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온갖 모욕과 비난과 인신공격이 당신에게 가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 바로 MBC 사장이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역사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책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역사의 축복으로 받아들입시오.

 

엄기영 사장은 나보다 좋은 조건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저보다 훨씬 '좋은 조건' 속에 놓여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노동조합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3년 8개월 동안 적대적인 노조의 저주와 해괴망칙한 인신공격을 당했습니다. 회사 주변은 온통 저주와 증오의 글귀로 가득찬 만장이 펄럭였습니다. <조선일보> 사설을 그대로 인용한 노조 성명서도 있었고, KBS 사랑한다며 지켜주겠다는 촛불시민들을 구박하고 험담을 퍼부은 집단이었습니다. 밖에서 휘몰아쳐 오는 핍박과 압박도 힘에 벅찬데, 내부에서 이렇게 나오니,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MBC 노조는 그런 악다구니 저주와 증오를 당신에게 쏟아 붓기는커녕, 지켜주겠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나오니, 그렇다면 정말 해볼 만한 싸움 아닙니까.

 

게다가 MBC는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니니, 감사원 망나니들이 거짓, 왜곡 감사로 골탕 먹이는 짓을 할 수도 없구요. 그리고 MBC는 세금 소송문제가 없어서, 무슨 배임죄니 뭐니 그런 것으로 순식간에 중범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엄 사장 당신은 나보다 엄청 '좋은 조건'에 있다는 말이 무리한 얘기는 아니겠지요.

 

다만 지금 하는 것으로 보니, 김우룡 이사장이 지휘하는 방문진 이사회가 그 모든 총대를 대신 메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우룡 이사장, 이분이 지난해 1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희한한 이야기를 했지요. 당시 한나라당 몫으로 국회에서 추천되어 방송위원회 위원 신분이었던 그는 "편파방송의 책임자인 정연주 사장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한 뒤 "정 사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변화를 가늠할 수 없는, 판을 뒤엎는 초강수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지요. 그의 말대로 진짜 판을 뒤엎은 초강수가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통위, KBS 이사회 등이 총동원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니, 이제 자기가 이사장이 된 MBC에서 온갖 초강수를 두려고 하겠지요. 벌써 초강수를 두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정연주

방문진 이사회에서 온갖 인간적인 모멸과 비난, 겁박이 있을 겁니다. 저는 지난해 KBS 이사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용히 제 지갑을 꺼냈습니다. 그 수첩에는 구약성서 시편 23편이 붙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나는 이 시편을 이사회 자리에서 혼자 읽고 또 읽고 하였습니다. 내 귓전으로 '무능경영, 편파방송' 등을 격하게 토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어도, 그 소리는 귓전을 그냥 스쳤을 뿐, 내 마음과 가슴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로 가득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종교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믿어와 익숙해진 방식과 의식이 기독교 쪽이어서 그 방식과 의식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 특히 거대교회는 예수를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들이지, 예수의 참 제자들은 아닙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 대신 우리의 가장 소박한 민간신앙인 조상의 영혼일 수도 있으며, 불교의 붓다일 수도, 이슬람의 알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야 무엇이었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길이 필요합니다. 방문진 이사회에서 인간적인 모욕과 비난이 있으면, 엄 사장 당신도 이 시편을 또는 당신 방식의 잠언을 읽으면서 그들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되십시오.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당신의 모습이나 인품이 신사여서, 이런저런 모멸에 '에이 더러운 것, 나쁜 사람들, 그냥 떠나자', 그렇게 할지도 몰라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던지고 나면, 후배들은 어찌 되며, 방송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MBC는 어떻게 되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최소한 저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포클레인으로 당신을 강제로 들어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의연하게 버티셔야 합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많은 벗들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리하리라 확신합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씩 웃으면서, 그리고 한국 방송 앵커의 상징적 존재로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말이지요.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 보내드립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입니다. KBS 신입사원 연수 때 첫 강의를 하고 난 뒤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시입니다.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도 읽으면서 힘내라고 많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추신: 괜한 편지를 써서 부담을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아끼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있는 MBC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무례를 한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담쟁이 수천 개가 당신과 함께 한 뼘씩 저 절망의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