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제 해임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언론인이 되어 독자를 만납니다. <오마이뉴스>는 오늘부터 주1회 <정연주의 증언>을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합니다. <편집자말> |
지난해 6월 2일, 아침에 출근해 보니, 책상 위에 팩스가 한 장 놓여있다. 대번에 알아볼 수 있는 글씨였다. 리영희 선생님이 보내신 것이었다. 비뚤비뚤한 글씨. 2000년 말,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뒤 신체의 오른쪽을 온전하게 사용하지 못하시는 선생님께서 그렇게 힘 들이고, 공을 들여 한 자, 한 자 적어 보내신 글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팩스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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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6월 리영희 선생님은 사퇴 압력에 시달리는 내게 손수 쓴 글을 보내주셨다. |
ⓒ 정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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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사장
전화들이 연결이 안 돼서 이리로 보내오.
상황의 진전을 주시하면서 정 사장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리고 있소.
같은 전선에 섰던 전우와 동지들이 허약하게도 스스로 할 바를 다하지 않고, 백기를 들고 꼬리를 감고 물러나는 꼴들을 보면서 한탄밖에 없소.
정 사장 한 사람이라도, 민주주의 제도의 책임 있는 '공인'(公人)이 자신의 권리와 직무와 직책을 정정당당하게 수행하는 자세를 끝까지 보여주면 좋겠소.
지금 나는 정 사장의 모습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고 있는 느낌이오.
반 민주주의 집단의 폭력과 모략으로 꺾이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명예롭게 소임을 다 하시오.
그래서 민주주의에도 영웅이 있을 수 있다는 모범과 선례를 남기시오.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
가슴이 저려왔다. 이 편지를 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전화 연결이 안 돼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짐작하시는 대로 좀 복잡합니다."
"그래, 잘 알아. 편지에도 썼지만 당신은 지금 배 열 두 척 가지고 있는 이순신 장군이야. 장렬하게 싸우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버티겠습니다. 그리고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라는 말씀,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마지막 사설 '야만의 시대'와 리영희 선생의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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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주 전 KBS 사장이 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언론악법 통과뒤 향후 언론지형에 관해 강연하기 위해 백재현 의원의 안내를 받으며 의총장에 입장하고 있다.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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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님께서는 이 전에도 가끔씩 당신의 뜻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쓴, 꼬불꼬불 글씨 편지를 보내시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전의 편지는 2003년 3월21일에 받은 것이다.
미국은 3월 20일 새벽, 지중해에 배치된 군함 6척에서 발사한 크루즈 미사일과 최신예 전투기인 F-117 폭격기를 동원하여 바그다드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다 밝혀진 사실이지만, 조지 부시의 미국은 온갖 거짓된 정보와 여론조작을 통해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야만의 이라크 침공은 결국 부시에게 몰락의 덫이 되었다.
3월21일자 <한겨레신문>은 '미, 바그다드 폭격'이라는 1면 머릿기사 바로 옆에 사설을 실었다. 사설 제목은 '야만의 시대'였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끝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 가는 일방적 군사공격을 시작했다"로 시작되는 이 사설은 신문사에서 통단사설이라 부르는 형태로 나갔다. 통단사설은 사설을 두 개 또는 세 개 주제로 나눠 싣지 않고,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사설 면을 통 털어 다룰 때 일컫는 말이다.
이 사설이 나간 날 아침, 리영희 선생님께서 팩스로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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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논설위원 시절 마지막으로 쓴 사설 '야만의 시대'를 보고 리영희 선생님은 손수 글을 써서 격려해 주셨다. |
ⓒ 정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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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21
논설위원실 정연주씨
오늘 아침 사설 '야만의 시대'는 한국언론사에 어쩌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래 처음의 대사설(명사설)로 후세에 길이 빛날 것을 믿소.
한 언론인으로서, 그 직업생애에서 그 같은 사설 한 편 남기고 물러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영광과 기쁨은 없을 것이요.
<한겨레신문>도 이 사설로 그 존재이유를 재확인 했고, 한겨레신문 독자들은 이 '야만의 시대'에 한겨레신문 독자임을, 그리고 훗날에는 그 독자였음을, 두고 두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소.
과찬의 말씀이었다. 이런 격려를, 더군다나 존경하는 언론계 지성계 대선배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명예일 뿐 더러 크나큰 힘이 되는 법이다. 리영희 선생님은 나뿐 만이 아니라 다른 기자들에게도 이렇게 직접 팩스를 통해, 또는 전화로 당신의 뜻을 직접 전달해오셨다.
('야만의 시대'는 내가 한겨레신문에서 마지막으로 쓴 사설이다. 바로 다음날 나는 한겨레신문을 떠났다. 동아투위 세대가 한겨레에서 해야 할 몫이 거의 끝나고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정 사장은 지금 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2008년 6월 2일 리영희 선생님으로부터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라"는 편지를 받을 즈음 나에 대한 사퇴, 해임 압박이 급박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님으로부터 격려 편지를 받고 난 얼마 뒤 백낙청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 형, 장렬하게 전사하시오. 그리고 나면 화려하게 부활할 겁니다."
어쩌면 두 분 어른의 생각이 이리도 같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었다. 감사원 특별감사, 검찰의 잇딴 소환 요청과 '배임 혐의' 언론 플레이, 국세청의 외주제작사에 대한 세무조사, 신태섭 이사의 교수직 해임과 KBS 이사 해임 등이 그 뒤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정치권력의 사유물화 해버린 권력집단의 난폭한 질주였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공적 권력이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그 권력에 적극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가장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 즈음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인편으로 메시지를 보내 오셨다.
"정 사장은 지금 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시 그렇게 큰 어른들로부터 격려와 위로와 사랑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다. 방송사 밖에는 밤이면 수많은 촛불시민들이 KBS를 지키겠다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지난주 나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바로 지난해 내가 어른들로부터 받은 격려와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알기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고생하는 엄기영 사장에게 선배로서 조그마한 격려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 글을 썼던 것이다. 엄 사장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편지 쓰기, 전화하기, 인터넷 댓글 쓰기부터 시간, 돈, 노력, 재능의 기부, 그리고 적극적인 투표 참여, 촛불집회 등 여러 집회 적극 참여, 크고 작은 모임 만들기와 참여.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의 역사 참여가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건강한 민주주의를 떠받히는, 가장 튼튼하고, 광범위하고, 무너트릴 수 없는 바위 같은 힘의 근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행동과 참여, 그것이 역사를 바꾸는 힘의 원천이라 생각된다.
민주당 압승 뒤에 숨은 공신 '무브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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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 당선과 민주당 압승의 숨은 공신 '무브온' |
ⓒ 무브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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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뜻에서 의미 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일등공신을 한 무브온(MoveOn.org)이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사건으로 탄핵을 당했을 때 탄핵은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공격이라며 클린턴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지금 회원수는 무려 500만 명 가까이 된다.
이 단체는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있다. 하나는 MoveOn.org Civic Action이라는 비영리 시민조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와 정치를 적극 옹호하고 이를 알리고 시민들을 교육하는 조직이다. 활동은 주로 웹사이트를 통해 이뤄지며, 저술과 강연 등 오프라인 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다른 하나의 기둥은 MoveOn.org Political Action이라는 정치단체다. 미국에서는 연방선거법과 세법에 따라 정치활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 보통 줄여서 PAC(팩)이라 부름)라는 조직을 구성하면 정치활동을 위한 모금, 후보자 지원 등 재정 지원을 할 수가 있다. MoveOn은 바로 이 정치조직을 통해 그 동안 엄청난 돈을 모아 지지하는 후보들에게 전달했다.
2006년 미국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에 압승한 데 이어, 특히 지난해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MoveOn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미국 사회에서 제기돼 왔다. 500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줬다는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단체가 만들어 낸 책이 있다. 무브온이 제시하는 '나라 사랑 50가지 방법'(MoveOn's 50 Ways to Love Your Country)이라는 책이다. 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이다. 어찌 보면 풀뿌리 시민참여 행동강령이라 불러도 좋은 것이다. 물론 미국의 정치 조건, 사회 여건 등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큰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참조하여 한국형 '나라사랑 50가지'를 만들 수 있다.
한국형 '나라사랑 50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책이 내거는 목표는 "어떻게 당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찾아내어 그것이 변화의 촉매제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정치적 목소리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정치적 견해를 분명하게 밝힌다는 뜻이다. 이런 목표 아래 다섯 개의 큰 분류가 있고, 그 각자의 분류 아래 구체적 행동강령이 제시되어 있다. 다섯 개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연대의 힘
2. 한 표가 중요하다
3. 미디어의 여러 얼굴들
4. 정치적 활동은 개인적인 것이다
5. 개인적 활동은 정치적이다.
이들 각 항목 별로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담겨있다.
1. 연대의 힘
- 효과적인 온라인 청원을 시작하라
- 온라인 청원에 대해 적극 알리라
- 그 청원에 서명하라
- 각자 알고 있는 정치 지식과 추천사항들을 공유하라
- 온라인에 대해 큰 소리를 내라
- 대통령(과 다른 정치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라
- 당신 선거구의 국회의원 등 대표자들을 만나라
2. 한 표가 중요하다
- 무슨 일이 있더라도 투표하라
-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투표자들을 동원하라
- 특정 쟁점과 관련하여 투표자 등록을 조직하라
- 당신 사무실 직원들을 모두 투표장에 가게 하라
- 선거 당일 최대한 투표가 이뤄지도록 하라
- 아는 사람들중 투표하지 않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하라
- (투표를 종용하는) 투표은행에 참가하라
3. 미디어의 여러 얼굴들
- 더 많이 읽고, 텔레비전 뉴스를 적게 보라
- 편집자에게 편지를 쓰라
- 편향된 보도에 반응을 보이라
-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사실에 관심을 갖도록 언론에 주의를 환기시켜라
- 광고를 내라
- 언론을 개혁하라
- 자신의 미디어를 만들라
- 독자란에 기고하라
- 정치적 (깨우침을 위한) 독서 클럽을 만들어라
- 무브온이 권장하는 미디어 자료들을 참조하라
4. 정치적 활동은 개인적인 것이다
- 국회에 편지를 보내라
- 당신이 선출하지 않은 관리들에게도 의사를 표현하라
- 깨끗한 선거를 지원하라
- 선거 캠페인에 자원 봉사하라
- 선거 캠페인이 잘 되도록 도움을 주라
- 당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직접 길거리로 나가 홍보하라
- 현역 선출자에 도전하기 위해 후보로 나서라
- 돈을 기부하라
- 집에서 파티를 열어 (정치적 공간을 넓히라).
- 효과적으로 청원을 하라
- 집회가 있으면 적극 참여하라
- 선출된 관리로 봉사하라
- 어디에 갇혀 있지 말고 열린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라
5. 개인적 활동은 정치적인 것이다
- 당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에 봉사하라
- (잘못된) 시 정책에 반대하라
- 전국적 쟁점들을 지역 단위에서도 반응을 보이라
- 시위에 참여하라
- (인권 등을) 보호하는 법률이 잘 이행되도록 하라
- 헌법 개정작업을 유도하라
- 사회적 책임을 하는 그런 일자리를 구하라
- 당신 가족과 함께 행동하라
- 정치적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작은 모임(살롱)을 주최하라
-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 힘을 발휘하도록 하라
- 다른 사람들이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도와주라
- 예술 활동을 통해 당신의 견해를 밝히라
- 당신의 정치적 비전을 홍보하라
한국 상황과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분 참고할 사항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도 있다. 더 보완한다면 우리의 '나라사랑 50가지 행동강령' 나올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생활 가까이에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참여를 하라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매우 구체적인 방안
'나라사랑 행동강령'과 관련하여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지난 6월 남기신 말씀 중에는 아주 쉬우면서도 구체적인 방법과 정신이 제시되어 있다. 내게는 절규처럼 들렸다. 그 뜻을 새기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인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지금 시점에서 우선 집중해서 풀어야 할 가장 절박한 문제는 미디어 문제다. 이명박 정권 출범 뒤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진보매체를 돕는 일이 그 중 하나다. 수구 기득권 언론이 압도적으로 여론시장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현재의 언론 지형 뿐 아니라, 특히 미디어 악법 통과 뒤 조중동 방송이 생겨나게 되는 상황까지 생각한다면 가장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정부 광고와 대기업 광고의 대폭 축소 등 중대하고도 실질적인 위협아래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민주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고착화될 수밖에없다.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고, 시간과 노력과 재능과 돈을 적극적으로 모으는 구체적 방안을 찾아야 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거대 담론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진단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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