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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창고]/생각주머니

[펌-한겨레] 크레인 위 마귀할아버지, 힘내세요~”

by 해운대등대지기 2011. 7. 22.

출처 : 한겨레 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488578.html

 

고공 농성 200일…김진숙을 지키는 4명 노동자들
20년만에 복직했다 또 해고…쌍용 닮아가고 있다

» (왼쪽부터) 박성호 박영제 신동순 정홍형씨.

오는 24일이면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고공 크레인 농성이 200일을 맞는다. 김 지도위원으로부터 10여m 아래, 크레인 난간에서 노숙하는 4명의 노동자들은 28일차 농성을 맞는다. 이들의 존재는 크게 알려진 내용이 없다.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켜야 한다”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들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있어 스머프라고 불리는 이들도 누군가의 존경하는 아버지,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일 게다.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 산업의 역군이었을 게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건 21일 저녁 늦은 밤이었다.

한여름, 크레인 위에서의 농성은 지옥에서의 생활과 같다. 30년 나이의 쇳덩이로 이뤄진 크레인은 녹이 많이 슬었다. 바람만 불면 쇳가루가 날아올라 폐를 위협한다. 30℃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달아오른 쇳덩이는 농성 노동자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목욕은 언감생심이다. 먹을 물을 하루 한번 올려주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장에 탈이 난 사람, 피부에 염증이 난 사람들이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채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12년만에 복직했다가, 또... 

남해수산고등학교를 나온 박성호(50)씨는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의 전신)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배 만드는 기술을 익힌 그에게 조선 기술자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그 때 부산에서는 배 만든다고 하면 알아줬거든요. 돈도 많이 벌 줄 알았고요.” 1982년 8월. 그는 열아홉의 나이에 조선기술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날품팔이를 하며 홀로 7남매를 키운 박씨의 어머니의 눈가에는 주름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고 했다. 박씨는 7남매의 막내였다.

박씨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가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입사한 지 10여년만인 1991년 8월 해고됐다.

1991년 한진중공업에는 박창수 당시 노조 위원장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어용노조였던 한진중공업 노조는 박 위원장이 당선되고 나서야 전국노동자협의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에 가입했다. 박 위원장은 구속됐다. 그런데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박 위원장은 1991년 5월 느닷없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백골단들은 안양병원에 안치돼 있던 그의 주검을 탈취해갔다. 그의 죽음은 끝내 의문에 부쳐지고 말았다.

박성호씨는 박 위원장이 숨졌을 때 노동조합 교육선전부장이었다. 박씨가 보기에 박 위원장의 죽음은 타살이었다. 가만 있을 수 없었다. 파업 투쟁을 벌였다. 그러다 끝내 91년 해고되고 말았다. 불법 파업을 벌이고 업무를 방해했다는 죄로 6개월간 구속생활도 해야 했다.

출소 뒤 박씨는 ‘박창수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1998년 12월부터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려고 국회 앞에서 420일동안 노숙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000년 10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배경에는 박씨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다 박씨는 2003년 12월 회사에 복직했다. 해고된 지 꼬박 12년 7개월만이었다. 2003년 10월17일 김주익 당시 노조 지회장이 타워크레인 위에서 자살하고, 곽재규씨가 같은 해 10월 30일 도크에 몸을 던져 얻어낸 성과물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2011년 2월 또 해고됐다. 8년만이었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그냥’ 해고 됐다. 불법파업을 벌인 것도 아니었다.

“동료들의 목숨과 바꿔서 얻은 복직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됐어요. 복직한 뒤로는 노동조합 활동도 조심스럽게 했었어요. 그런데 또 해고되고 말았네요.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위한 출근투쟁에 함께 한 게 죄라면 죄지요. (노동조합 활동하면 해고되던) 세상이 바뀐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박씨는 크레인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김 지도위원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그게 삶의 목표가 되었다고 했다. 몸은 힘들지만 아이들이 박씨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위로였다.

“큰 애가 고등학교 1학년, 작은 애가 중학교 3학년이에요. 애들이 2차 희망버스 따라서 아빠 본다고 영도 조선소 앞까지 왔다가 경찰에 연행됐어요. 아이들이 상처받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냥 세상에 단련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박씨의 가족들은 7월30일까지 김해 사원 아파트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입니다.”

세 가족의 가장인 박씨의 속은 타들어 간다. 박씨의 피부 곳곳에는 스트레스성 염증이 생겼다.

 

» 21일 부산시 영도구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 앞 전경사진. 이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과 네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조소영 피디

20년만에 복직했다가, 또... 

고 김주익씨와 곽재규씨 덕분에 한진중공업에 복직한 사람들은 총 16명이었다. 두 명의 노동자가 연달아 몸을 던져 해고에 항의한 끝에 한진중공업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주었다. 1986년 해고됐던 박영제(53)씨는 이 때 살아난 16명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꼬박 20년을 넘긴 뒤 2006년 1월1일에야 복직했다.

박씨는 1986년 당시 ‘여자 용접공’ 1호로 유명했던 김진숙씨와 노조를 만들려다 해고됐다. 겉으로 명시된 해고 사유는 ‘상사명령 불복종과 회사 명예 실추’였지만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노조를 만들려다 찍힌 죄였다.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20년이 흐른 뒤 2006년 복직했을 때는 정말 꿈만 같았다. 그러나 함께 해고됐던 김씨는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박씨는 “회사는 ‘김진숙만큼은 안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는 2009년 11월 “김진숙의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정한 바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일했어요. 복직한 뒤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일을 맡았습니다. 제가 감독한 배가 완성돼서 떠나갈 때, ‘조선 1번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은 대단했지요. 김 지도위원을 위해서라도 해고돼서는 안되었는데...”

그러나 그는 또 해고됐다. 이번엔 이유도 없었다. 선박조립파트에서 열심히 용접 일을 한 게 죄라면 죄였다.

“2월14일 정리해고 명단 발표를 보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 것도 아닌데 자기들 멋대로 사람을 다시 자르다니요.”

박씨는 요즘 죽은 김주익씨가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곰같이 우직한 사람이었는데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샤워하러간다고 해놓고는 타워크레인에 몰래 올라가더니 129일만에 죽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김진숙 지도위원이 우리에게 귀띔도 안해주고 그 자리에 또 올라가 있고. 우리는 또 해고됐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가 살맛나는 세상은 언제나 오나요.”

고1과 고3이 된 딸 둘을 둔 가장인 50대의 늙은 노동자는 우리 사회가 원망스럽다.

2009년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닮아가는 가정 

 신동순(50)씨는 1995년 8월22일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서른 다섯의 다소 늦은 나이였다. 이전에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던 터라 그는 입사할 때부터 철판 절단 기술자였다. 철판 절단 기술을 개선시킨 공로로 회사는 신씨에게 97년 ‘개선 제안상’을 안기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크레인 운전 자격증까지 갖고 있었다.

‘열심히 일만 하면 잘리는 일은 없겠지.’ 신씨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저도 이번에 해고됐어요. 인간적으로 회사 관리자들이 미워요. 선박 수주 못한 게 우리가 일 열심히 안한 탓인가요? 2003년 두 명의 노동자가 대량해고를 막으려다 죽었는데 그 일을 또 반복하고 있어요.”

역시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었던 신씨의 가슴에는 ‘증오의 꽃’이 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5년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해고 됐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씨는 해고 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 속의 답답함은 그를 크레인 위로 올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윗 사람에게 잘 안보여서 잘린 건가. 아니면 3년 전 치매 걸린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려서 찾으러 다니느라 몇 번 조퇴한 것 때문에 그런가.”

신씨에게는 지금 군대에 가 있는 아들이 한명 있다. 이제 일병을 달았다. 해고 되면 아들의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결국, 신씨의 부인 조아무개(46)씨가 지난 해 12월부터 휴대폰 제조업체에서 유리 액정을 만지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시급 4400원에 하루 12시간 근무. 김해 사원 아파트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들은 ‘죽은 자’인 신씨 가족에게는 연락도 뚝 끊었다. 7월30일까지 집을 비우라는 회사의 통보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신씨 가족을 짓누른다.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가정은 2009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가정의 과거를 잔인하리만치 닮아가고 있다.

» “하나, 둘, 셋! 신동순 할아버지 힘내세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조합원의 아이들이 85크레인 중간에 올라있는 조합원을 응원하고 있다. 사진 조소영 피디
 

연대세력을 외부세력으로 부르는 사회 

다시 외부세력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정부와 재계는 입을 맞춰 “외부세력 개입 안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문제에는 한진중공업 노사만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악명 높은 독재정권의 산물 ‘제3자 개입 금지법’이 떠오른다.

 정홍형(49)씨는 그래서 답답하다. 그는 85호 크레인 밑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 4명중 유일한 외부세력이다. 정씨는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아니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조직부장이다. 한진중공업은 산별노조의 형태로 금속노조에 가입돼 있으니 금속노조는 한진중공업의 교섭 당사자이고 정씨는 엄밀히 말하면 외부세력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외부세력’이라고 부른다.

‘외부세력’이란 말은 “가진 사람들의 언어”라고 정씨는 주장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과 사람이 연대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 사회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끼리 서로 돕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외부세력이란 말을 꺼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겹게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겁니다.”

‘연대’라는 말을 ‘개입’으로. ‘동지’라는 말을 ‘외부세력’으로 바꾸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는 정씨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툭하면 우리를 빨갱이처럼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색깔을 덧씌워 고립시키려는 거죠. 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내 주변의 노동자 이웃을 돕는 게 빨갱이라면 빨갱이가 되고 말겠습니다.”

정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귀환 할 때까지 절대 크레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고1, 중3이 된 아들 둘이 일주일에 한번 씩 공장 앞을 찾아와 손을 흔들어주고 가는 것이 정씨에게는 큰 위안이다.

21일 밤은 여름 날씨 답지 않게 쌀쌀했다.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오슬오슬했다. 저녁 8시 30분 문화제가 끝난 한참 뒤에도 한진중공업 앞 신도 브래뉴 아파트 앞 인도에는 시민 이십여명이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이곳을 찾는 서영섭 신부는 한참을 서성인 끝에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야 발을 떼었다.

어떤 이들은 익숙한 듯 밤샘 노숙을 준비했다.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처럼 유명인들도 있었고, 손을 꼭 붙잡고 인도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연인도 있었다.

이들의 모습을 30미터 높이의 85호 크레인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

부산/글·허재현 기자, 영상·사진 조소영 피디 catalunia@hani.co.kr

 

 

비해고 노동자들도 “집에 갈 수가 없다”

 21일 저녁 8시 30분. 부산시 청학동 봉학초등학교 앞 인도에서는 간단한 문화제가 열렸다. 백여명의 시민들이 네줄로 앉아 문화제에 참석했다. 군데 군데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와 비해고노동자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인천에서 찾아온 대학생 십여명도 이날 함께 하고 있었다.

“김진숙님.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면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오른 손을 흔들어 대었다.

문화제를 마친 시민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인근 신도브래뉴 아파트 단지 아래 상가 근처에 모여 노숙을 준비했다.

홍성노(39)씨는 봉학 초등학교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홍씨의 눈은 여전히 85호 크레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다. 다행히 지난 2월 발표된 해고의 칼바람을 피한 비해고자였다. 해고 노동자들은 홍씨 같은 사람들을 ‘산 자’라고 불렀다.

“저 아래 네 명의 사람들이 더 있어요.” 홍씨가 입을 열었다. 김 지도위원이 농성을 벌이는 크레인 아래에는 네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6월 27일 파업농성장에 법원 집행관이 투입돼 농성자들이 강제 해산당할 때 끝까지 크레인을 지키며 공장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성호형은 잘릴 사람이 아니에요. 2003년 12월에 복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성실하게 일만 했었어요. 엔진을 조립하는 형 손에는 기름 때가 늘 묻어 있었어요. 형은 딴 생각하기 싫다면서 일에만 파묻혔어요. 그런데 형은 죽었고(잘렸고), 그 옆에서 일하던 저는 살았어요.(안잘렸어요) 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집에 못가겠어요.”

홍씨는 크레인 아래에서 여전히 농성을 벌이고 있는 박성호(50·한진중공업 해고자)씨의 직장후배였다. 박씨의 밑에서 엔진조립 일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한달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 앞에서 노숙을 하며 박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홍씨의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다. 쌀쌀한 저녁 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용준(57)씨도 비해고자이지만 집회에 참석했다. “2003년 (김)주익이가 목매 죽었을 때 나는 그걸 그대로 본 사람이라요. 근데 저 자리에 또 김진숙씨가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고. 내가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그는 끝내 담배 한대를 꺼내 물었다. 반백발이 되어서 정리해고를 피한 노씨의 눈가에는 안도보다 회한이 가득해 보였다.

허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