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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Book

(2024-#07)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by 해운대등대지기 2024. 7. 30.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 김춘미 옮김 / 비채

 

소설의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는 건축학과를 막 졸업한 청년으로

평소 존경하는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사무실에 자기 소개서와 졸업작품으로 만든,

휄체어 타는 식구가 있는 가족을 위한 집 설계 플랜을 동봉해서 우편 보낸 후

1979년부터 일절 신규 채용을 하지 않는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실에 예상을 깨고 채용된다.

설계사무소는 도쿄의 아오야마에 있지만

여름이면 온 사무실이 다 가루자와의 아오쿠리 마을에 있는 여름별장에서 지내는데,

마침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하는 무라이 슌스케 선생과 설계 사무실 직원들과 보낸 시간들을

아주 섬세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모두 건축 설계사무소와 관련된 까닭에 다양한 건축물이 소개되고,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개되는 가구, 조명 등을 자연스럽게 검색하며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아오쿠리 마을을 상상하면서,

별장에서 간단한 농사를 지으며 식자재를 자급하기도 하고,

다양한 요리를 하고, 차와 술을 간단히 나누기도 하며 설계 경합을 준비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아주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오르기도 하여,

묘하게도 번잡했던 마음이 힐링되는 느낌도 받았다.
일본 원제인 '화산자락에서'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훨씬 더 내용과 어울리는 것 같다. 

 

직원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춰,

음악, 요리, 의상, 곤충, 조류 그리고 역사에 대한 작가의 배경지식이 놀랍기도 했지만

아주 가끔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주인공 사카니시는 슌스케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소설 곳곳에 묻어난다.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 (p 60)



 “선생님 건축에 들어서면 아무도 큰 소리를 안 내게 되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촉감이라든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광선이라든가
늘 쓰는 사람이 한참 지나서 겨우 알아챌 수 있는 장치들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나 같으니까,
사람 목소리도 거기 맞춰 작아지지….”(p 81) 

 무엇보다도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생각은 늘 선생님 설계의 중심에 있다. (p.119)

 신경이 구석구석 미친다는 것과 신경질적인 것이 어떻게 다른가,
선생님의 덧붙인 선에 그 대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p 146)


 경합을 한달여 남기고 도서관 플랜 마감에 집중하려고

슌스케 선생은 주인공 사카니시만 동행해서 다시 별장으로 떠났지만

아쉽게도 뇌졸증으로 쓰러져 경합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서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 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p 415) 
                      

소설 곳곳에 유명 건축물이 소개되지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축 프로젝트가

스웨덴 건축가 아스플룬드의 ‘숲의 묘지’, ‘숲의 예배당”이다.

 

 아스플룬드는 장남의 죽음을 전후해서 설계에 들어간 ‘숲의 예배당’의 문 스케치에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라는 명판을 그려넣었다. (p 170)

 한편 숲의 묘지에 설치된 긴 돌 진입로는 의지를 지니는 인간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전제로 똑바로 깔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그것은 어쩐지 성경의 ‘계약’이라는 말은 연상시킨다. 신과 인간의 일대일의 관계를 직선으로 맺는 것이 어울린다. (p 341)

 

 사람이 죽어 숲으로 돌아간다는 스웨덴 사람의 생사관으로부터 착안되어

육체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자연스럽게 화장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숲의 묘지’ 프로젝트를 소설 속에서 처음 접하면서

건축이 사회적 문화나 철학까지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건축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속의 슌스케 선생은 요시무라 준조라는 건축가가 모델이라고 한다. 
실제 요시무라 준조는 소설 속 아스카야마 교회의 모델이 되는 산리즈카 교회를 설계하고
아오쿠리 마을의 별장의 모델이 되는 숲속의 집을 설계했다고 한다. 

 

산라즈카 교회

 

숲속의 집

 

 

 

 

https://silentmasters.net/article/junzo-yoshimura/







 

Junzo Yoshimura – Silent Masters

Junzo Yoshimura could be described as the most classical among contemporary Japanese architects. The foundation of his approach to composition lies in the combination of basic building elements into a hierarchical virtuosity, which transforms the archetype

silentmasters.net

 

 

 

 

소설속 슌스케와 현대국립도서관 경합의 경쟁자로 나오는 후나야마 케이이치의 모델은 단게 겐조로, 
히로시마 평화공원, 도쿄도 청사 등을 설계했다고 한다. 

 

실제 위의 링크에서 확인되는 요시무라 준노의 작품들과는 상당히 건축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내가 읽은 일본 소설은 아마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기억나는 것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리고 얼마 전 읽었던 ‘은밀한 결정’이 고작일 정도?

그래서 일본 작가에 대해서 지식이 전무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강렬한 묘사
다자이 오사무의 깊은 사색
마루야마 센지의 선 굵은 뚝심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리시한 여백

 

책의 띠지에 등장하는 작가들 중 무라카미 하루키만 언젠가 한번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이다.

이 책을 읽고 모임에서 친절한 회원 한 분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주셨다.

이 두 작가의 책들과 다른 일본 작가의 책들을 좀 더 읽고, 

이 책의 작가인 마쓰이에 마사시에 대한 나의 느낌이 다시 정리되면

비로소 완전한 독후감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