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도리스레싱 / 정덕애 옮김 / 민음사
레싱은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착안하게 된 사건 두 가지를 밝혔다.
하나는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내려온다는 한 인류학자의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어머니가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상적인 세 아이를 낳은 뒤 태어난
네 번째 딸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망쳤다고 하소연 하는 것을 읽은 일이다. (작품해설 中, p203)
2차시계대선 이후 히피로 대표되는 일명 저항의 시대로 대변되는 1960년대에는 성적, 문화적, 정치적 자유주의가 확산되던 시기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영국에서도 자유주의적으로 개방된 모습으로 사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던 시기이다. 당시 문란했던 혼전 성관계나, 이혼 또는 혼외정사 등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고 있던 두 남녀가 직장파티에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은 성장 과정은 각각 달랐지만 고전적인 가정을 꿈꾸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필요 이상 큰 빅토리아 풍의 저택에서 다자녀를 꿈꾸는 그들에 대한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간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 (p33)
그들은 결혼, 가정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지키려 노력하고 그것을 성공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러기 위해서 데이비드는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야 했고,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가 집과 아이들을 맡아 돌보며, 휴가나, 행사 때마다 그곳에 초대된 친척, 지인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결혼 후 6년 사이에 네명의 아이들을 출산하면서 해리엇 역시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찾아온 다섯번째 아이 벤. 벤을 임신 중에도 해리엇은 무척 힘들어 했고, 뭔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리고 출산 후에도 벤은 축복의 대상이 아니라 가족의 화합을 파괴하고, 증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성장하게 된다. 해리엇은 벤의 존재가 마치 자신의 잘못임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로 그녀는 그들이 벤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내가 죄인인것 처럼! 그녀는 분노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마음을 끓이며 보냈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데이비드도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 주는 거야.
마치 그 여자만 잘 못한 것처럼. 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쟎아.” (p90~91)
주변의 가족들은 벤을 요양소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 다른 종류의 장소가 없다면 그래야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약 무슨 일인가
하지 않으며 비극적인 파국이 닥칠거야”
“이미 파국이지” 자리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앉아 있던 도러시기 밀헸다.
“다른 아이들….. 그 애들도 고통을 받고 있어. 넌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건 보지 못하고 있어, 얘.”
“이봐, 난 동의해. 그리고 때론 당신도 동의해야 돼.
내가 아는 한 그 때는 바로 지금이야. 나도 더 이상 견디어 낼 것 같지 않아.”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부인을 쳐다보았다. 애원하는 듯한 고통스러운 눈길이었다.
제발, 그는 해리엇이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p110)
벤을 요양소로 보내고 해리엇은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안도하게 되었고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 긴장을 오래 견뎌 냈는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벤을 추방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벤에 대해 생각할 떼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에서 정상적인 감정의 불티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오히려 죄의식과 공포감으로 그녀는 밤에 잘 수 없었다. – (p116)
결국 해리엇은 요양소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있는 벤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모성애란 전통적 가치관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가정보다는 일에 집중하게 되고, 첫째 루크와 둘째 헬렌은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의사와는 달리 각각 제임스와 몰리의 도움을 받으며 기숙사 학교에 진학하여 집을 떠나 가족으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간다.
그날 저녁 그녀는 벤과 함께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그녀를 떠나 다른 방으로 옮겼다.
이때 그녀는 가족 생활을 위해 벤을 재교육시키면서 자신이 벤으로부터 그들을 방어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녀가 자기를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벤과 함께 낯선 땅으로 가는 것은 선택했다고 느낀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p133)
벤은 가족과 동화되지 못하고 그래서 해리엇은 벤을 벤이 따르는 정원사 존과 그 무리들에게 방과 후 돌봐 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상 감당할 수 없는 벤을 가정과 되도록 분리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긴 하지만 거의 방치에 가까워 보였다. 존마저 떠나자 벤은 학교의 불량한 무리들과 어울리며 비행을 저지른다. 집을 팔고 데이비드와 떠나 벤의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는 해리엇을 묘사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 된다.
도로시의 도움과 제임스의 후원이 아니었더라면 지속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소설 속의 부부가 꿈꿨던 행복한 가정이 벤이라는 존재로 끝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들이 꿈꾸었던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 책은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또한 “벤”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양소에서 벤을 데리고 오는 해리엇의 모성애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이후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을 생각하면 해리엇이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몰리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해리엇이 줄곧 벤에게 보여줬던 모습에서 전통적인 모성애를 옅볼 수 없었기에 어쩌면 해리엇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위한 이기적 결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내가 해리엇이었다면'이라고 상상하면 더더욱 그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떳떳할 자신이 없다.
이 책을 읽고 초반부에는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고집스러운 행동에 화가 나기도 했다. 도로시의 희생과 제임스의 후원을 보며 시대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부모의 역할을 놓고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등장 인물들의 이중적 감정들을 생각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본성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들 부부가 부모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낸 행복이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가정의 행복은 그 구성원 중 어떤 누구의 희생을 딛고 만들어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들어 놓은 행복의 모습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듯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른 삶을 추구했다면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고립이나 소외없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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